결단의 신화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 쉬운일은 아닐거다. 출가, 구도의 삶, 오체투지, 묵언수행... 생각만해도 편치않아 보인다. 물론 쉽게 얻었다는 사람도 있긴하다. 일상의 재발견, 뜻밖의 깨달음, 작은 것에서의 배움 등등... 하지만 다수의 바람대로 깨달음을 사회적 성공으로 연결시키고자 한다면, 쉬운 항목은 다윈이래 설 자리를 잃었다. 적자생존의 원칙하에 견과 소의 깨달음으로는 타인과 차별화를 이룰 수 없고, 따라서 경쟁에도 도움이 안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얼마전 한가로이 과자를 먹으면서 웹서핑을 하다 놀라운 깨달음을 얻은 줄 알았다. 바로 실생활에 써먹을 수 있기에 더 빛이나는 그런 깨달음 말이다. 


-장면 1-
삼성전자에 근무하는 일본인 고문에 관한 기사를 읽던 중이었다. 도요타서 30년간 일한 뒤 삼성으로 자리를 옮겨 노하우를 전수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는데 내용중에 흥미로운 부분이 있었다.

-그럼에도 반도체 산업이 일본을 누를 수 있었던 이유는.
“일본은 설비 관리를 너무 잘한 게 문제다(웃음). 옛 장비를 워낙 잘 보전하다 보니 신제품도 그걸로 만들었다. 반면 삼성은 최신 제품을 최신 설비로 제작했다. 경영진이 용기를 내 과감한 투자를 한 덕분이다.

-장면 2-
최고중의 최고인가 하는 순위매기기 프로그램을 보던 중이었다. 이번 주제는 탱크에 관한 것이었는데, 그 당시 독일탱크를 몰았던 할아버지의 답변이 인상깊었다. 재구성해보자면 이렇다.

"팬저는 완벽했지만 실패한 모델입니다. 이를테면  이런거죠. 이 벨트는 마이바흐사에서 만든 것으로 10년 이상 사용할 정도의 내구성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문제는 팬저의 평균 수명이 3주가 채 되지 않았다는거죠(적 전차에 파괴된다는 이야기). 이게 독일인들의 특성입니다. 생산력이 중요할때도 완벽한 물건을 만들어내려고 하죠. 소련처럼 숫자에 치중했다면 전쟁 결과는 달라졌을겁니다. 사실 우리네 인생이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구나! 너무 잘해도 탈이구나! 대충해도 결단 빠르고 많이 해내면 이기는구나!
깨달음을 얻었으면 널리 세상을 이롭게 할 일이다. 대충 처리하기는 어렵지않으니, 문제는 과감한 결단과 폭발적인 생산력에 있다. 일단 과감한 결단에 집중하기로 했다. 최근 공부하는데 필요로 했던 책들을 대거 구매하고, 관련 학원도 확정지었다. 피로 회복 차원에서 공중목욕탕 이용권도 구매했다.

자연스럽게 전자기기 쪽으로 관심이 갔다. 이 결단은 생산력도 높여줄 듯 보였다. 컴퓨터 바꾸면 OS 부팅빠르고 인터넷브라우저도 빨리 뜰테니 생산성을 더 높일 수 있을듯 했다. 전자사전을 사서 단어검색 시간마저 줄이면 소련이 T34탱크 뽑아내듯 생산력을 높여서 경쟁에서 승리할 듯이 보였다. 자금 사정상 전자사전부터 구매하기로 했다.

약간의 고민과 과감한 결단력으로 잽싸게 샀다. 카시오 EX-H7100. 반나절 최신 사전의 놀라운 기능을 시험하면서 빠른 결단에 흐뭇해했다. 그런데 다음날, 전자사전을 용도에 맞춰 사용하던 중 사소한 결점을 하나 발견하게 됐다. 책상에 놓고 입력할 때 가끔씩 달그락거려서 조사해보니 사전 바닥의 고무 4개중에 하나가 떠 있는게 아닌가?

물질적 문제는 변함없지만 심리적인 심각성은 커져만갔다. 인내의 과정끝에 체념하고 받아들이게 됐지만 이를 야기한 깨달음에 대해서는 재고해보기 시작했다. 조심스럽게 내 깨달음이 카시오사에서도 일어났던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원가 줄이고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과감한 결단으로 공장을 중국으로 옮기는 과정에 관여한 깨달음. 구소련이 전쟁중에 우랄산맥에서 T34찍어내듯이 카시오사가 중국의 어느 시골에서 농민들 모아다 H7100을 찍어낸건 아닐까? 카시오사의 생산성은 높아졌을지 모르겠지만 과연 그것만으로 전자사전 시장이라는 치열한 전쟁 한복판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런 품질로 말이다.

어쨌거나 카시오사가 내 작은 깨달음에 반증을 하나 제시해 줬다. 하지만 어디 이런 문제가 그 회사에만 있으랴? 농심 새우깡의 중국 생산도 이런 맥락하에 이뤄졌을 것이다. 결단력과 생산력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장인정신이 설 자리는 없는게 아닐까?

쉽게 얻은 깨달음, 역시나 손쉽게 보편성을 상실했다. 하지만 문장을 조금 바꾸면 이를 다시 획득할 수 있지 않을까?
'생산성이 중요할 때는 빠른 결단이 필요하다?' 정도?
지금이 그런 시기인지 좀 더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by parksid | 2008/03/25 15:01 | 근황 | 트랙백 | 덧글(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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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ed by ㆍㅅㆍ at 2008/03/25 19:01
즐거운글 잘 읽고 갑니다. 확실히 융통성이라는걸 생각하게 하넹. 그리고 왠지 모르게 분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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